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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생각들

스크랩) 교육 개혁-안병영 연대 명예교수

안병영 교수는 “교육을 통해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변화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란 점을 적시하며 따라서 교육 개혁은 “장기적 관점에서 설계되어야 하고 그 성과 또한 지속적으로 발효되고 축적될 수 있도록 구상”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이유로 “규범성과 적실성”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으며 점진적 개혁 추구가 가능한 현실적인 준거 틀로 사회투자 국가(social investment state)론을 들면서 그 모델이 “기회(혹은 생애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지속적 고용능력(sustainable employability)의 제고에 역점을 두는 장점이 있다고 짚는다. 이어서 1996년에 직접 참여해본 ‘5·31 교육 개혁’의 공과를 돌아본 끝에 이제 남은 과제로서 “정권의 수명을 넘어서” 한국 교육의 내일을 담보할 대타협 기구인 ‘미래한국교육위원휘’ 창설을 강하게 제언한다.

 

 

교육 개혁

1. 머리말

열린연단에서 처음 요청한 강연은 ‘윤리와 인간의 삶’이라는 대주제를 바탕으로 본 ‘학교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주제를 ‘교육 개혁’으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강연 주제로 확정되었다. 내가 주제를 바꿀 것을 제안한 이유는, 한국의 현실에서 보다 절실하고 실제적인 쟁점을 다루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 주제가 더 적당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30여 년간 대학 교단에 선 교육자이긴 하지만, 전공은 정치학, 행정학이고 교육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두 차례 교육부장관을 지내면서, 정책적 · 행정적으로 교육 문제에 깊이 관여한 까닭에 더러는 교육 전문가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교육 관련 주제를 철학적 · 학문적으로 논의하기에는 매우 미흡하고, 따라서 그런 기회는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문민정부에서 처음 교육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1995년 12월~1997년 8월) 당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던 ‘5·31 교육 개혁’에 깊이 관여했고, 이후 참여정부에서 두 번째로 교육부 수장을 맡았을 때(2003년 12월~2005년 1월)도 크고 작은 개혁 정책에 관계하며 적잖은 고민을 했기 때문에 새 주제에 관해서는 비교적 할 얘기가 많다.

 

우선 이 강연의 키워드인 ‘윤리’와 ‘교육 개혁’에 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나는 ‘윤리’를 ‘마땅히 지키고 준수해야 할 행동 규범’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 · 근본적 속성이 강한 ‘도덕’이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마찬가지로 규범성을 공유하지만 그보다는 실생활에 더 가깝고, 구체적이며, 관계론 · 방법론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자의적인 해석일지 모르나, 윤리는 그 바탕이 되는 규범성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합리성과 실효성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교육 개혁은 문제 해결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규범적으로 바람직하더라도, 합리성과 실효성이 떨어지면 의도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주1)
다음으로, ‘교육 개혁’은 거시적 관점에서 교육 체제를 크게 바꾸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규모의 미시적 개혁이나 정책 변개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교육은 공공성이 강한 영역이며, 국가의 장래와 미래 세대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 따라서 교육의 ‘새 판’을 짜는 교육 개혁은 그 자체로 상당한 역사성을 지닌다. 특히 대규모 교육 개혁은 교육계 전반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반하며, 그것이 다른 사회 영역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당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리’와 ‘교육 개혁’을 함께 엮어 본 강연 내용을 집약하면 다음과 같다. 규범적으로 바람직하고, 그러면서도 합리성과 실효성, 즉 적실성()을 갖춘 교육 개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 어떻게 실행되어야 할 것인가.

 

2. 바람직한 교육 개혁의 방향

교육은 내면과 정신의 질적 변화를 포함한 인간의 심층적 · 총체적 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변화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다. 또한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투자는 투입된 자본의 회임 기간이 길고, 그 결과를 측정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따라서 교육 개혁은 마땅히 장기적 관점에서 설계되어야 하며, 그 성과 또한 지속적으로 발효되고 축적될 수 있도록 구상되어야 한다. 규범성과 적실성의 차원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육 개혁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2. 1.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와 균형

교육 개혁의 규범적 · 정책적 기조를 논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수월성과 형평성이다. 수월성과 형평성의 가치가 지향하는 바는 서로 대조된다. 수월성은 교육에서 능력 신장과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며, 따라서 경제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크게 강조한다. 그러므로 엘리트주의적 속성이 강하며, 주로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에 반해 형평성은 교육 기회의 평등과 뒤처진 이에 대한 배려에 더 큰 관심을 쏟으며, 교육 소외의 극복, 교육을 통한 사회적 연대와 결속을 지향한다. 그 때문에 민중주의적 목적의식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보수 정권은 수월성 위주의 교육 정책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며, 진보 정권은 상대적으로 형평성을 중시하는 정책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념적 성향이 짙은 정권일수록 그 편향의 정도도 심하다. 이렇듯 수월성과 형평성의 개념은 이념적 함축성 때문에, 태생적으로 ‘정치화’될 소지가 크다(안병영, 2010).

 

수월성과 형평성의 이러한 대조적인 특성 때문에 많은 이가 양자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그로 인해 둘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학습자의 발전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키울 수 있는 종합적 · 균형적 교육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수월성과 형평성은 기본적으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교육적 가치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양자의 균형과 조화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쟁과 상생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정책 이념 또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실제로 어느 나라에서나 교육 정책을 수립할 때 외곬으로 수월성과 형평성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평등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성향이 강한 스칸디나비아의 교육에도 적잖은 수월성 위주의 정책이 분명 존재하고, 전형적인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 교육에도 형평성을 추구하는 교육 정책이 더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육 레짐은 어차피 정책 조합(policy mix)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다양한 교육 정책이 함께 어울려 구성하는 거시적 성좌()다. 그 거시적 틀 안에서 수월성과 형평성에 바탕을 둔 정책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전체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교육 정책에 있어 수월성과 형평성 간의 관계 설정, 즉 양자의 비중과 분포, 그리고 조화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는 교육 레짐, 시대사조, 정권과 이념, 정책 결정 과정 및 그 책임자의 특성 등을 들 수 있다(안병영, 2010). 1980년대 이후, 세계화, 정보화 및 지식사회화라는 거대한 시대사조가 많은 나라의 교육 정책을 수월성 쪽으로 편향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대체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때 새 정권은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정책 조합에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권 교체에 따른 적정 수준의 변화와 새로운 ‘균형 잡기’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육 정책만큼은 그때그때 바뀌는 정권의 이념과 정책 지향에 따라 지나치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상대적 비중과 실천 전략은 교육 단계별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가능한 한 인성 교육에 좀 더 큰 비중을 두고, 여기에 더하여 창의성의 씨앗을 뿌리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기존의 암기식 지식 교육과 시험을 통한 줄 세우기식의 경쟁 교육은 가능한 한 축소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초등학교까지의 교육 개혁은 수월성보다는 형평성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중고등학교부터는 인성 교육의 비중을 조금씩 줄이면서, 창의성 계발과 연계하여 지식 교육의 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중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형평성과 수월성을 조화롭게 배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대학 교육에서는 수월성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요컨대 유치원 및 초등교육 과정에서 인격의 기본을 세우고 창의성의 샘을 발견한 후, 중등교육 과정부터 좀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의 틀 안에서 지적 · 정서적 능력 계발에 힘쓰다가, 대학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특성화와 다양화의 측면에서 학습자 개인의 총체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하도록 교육 제도를 설계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자는 구상이다(안병영, 2015a).

 

2. 2. 점진적, 합리적 개혁: 이상과 현실의 조화

비단 교육 개혁뿐 아니라, 모든 개혁에 있어서는 그 폭과 깊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때 개혁의 주체가 이념적 성향을 강하게 띨수록, ‘변혁’ 수준의 큰 변화를 추구할 개연성이 높다. 일거()의 대개혁으로 ‘새 판’을 짜보려는 유혹이 그것이다. 그러나 합의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다원적 민주 사회에서는 ‘변혁’이라 할 만한 대개혁을 시도할 때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사회경제적, 이념적 갈등이 첨예한 사회에서 어느 한쪽을 대표하는 집권 세력이 이른바 ‘대못 박기’식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개혁은 자칫 국민의 분열과 사회의 대규모 혼란을 불러일으키기기 십상이며, 이는 불가피하게 개혁의 집행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일 이후 정권 교체에 의해 이념적 지향이 상이한 차기 정권이 들어선다면 새 정부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에 앞서 ‘대못 빼기’에 나서게 되고, 대결 정치의 악순환은 더욱 격화된다.
그러나 기존 체제가 오랜 구습()과 적폐()로 심각하게 녹슬어 웬만한 조치로는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 혹은 국제적 차원의 문명사적 전환이 있거나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체제적 대전환이 일어나는 등 거대한 사회 개혁을 위한 절호의 역사적 순간을 맞았을 때에는 개혁의 수위도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의 차원으로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개혁은 이상과 현실의 대화다. 과도하게 현실에 집착하여 좌고우면하다 보면 개혁의 꿈과 빛을 잃는다. 반면, 지나치게 이상만을 추구하다가는 자칫 교조주의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성숙한 민주 사회에서의 개혁은 급진적, 파격적, 교조적 개혁이어서는 안 되며, 이념이 다른 차기 정권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합리적 수준의 점진적 개혁이어야 한다. 그래야 개혁의 성과가 정권의 수명을 넘어 지속적으로 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3. 사회적 합의의 추구

커다란 개혁일수록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정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국민의 기대와 열망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매체를 동원해 정부의 개혁 조치나 정책을 국민에게 선전 · 홍보한다. 다만 그것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다원적 민주 사회에서는 사회적 합의의 수준과 그 농담()의 정도가 개혁의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요 정책 결정이나 개혁을 둘러싼 담론은 크게 조정적 담론(coordinative discourse)과 소통적 담론(communicative discourse)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정적 담론이란 정책 엘리트 상호 간 혹은 정책 엘리트와 사회 집단 간의 정책을 조정할 때 이루어지는 담론을 뜻하며, 소통적 담론은 정책 엘리트에 의해 채택된 정책의 필요성과 적절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반 국민을 설득하는 담론을 의미한다(Schmidt, 2002; Schmidt & Radaelli, 2004). 이렇듯 사회적 합의는 정치 집단 간, 이해관계 집단 간, 그리고 국민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주요 정당 간의 정책 합의는 매우 중요하며 이는 정책 형성 및 집행 과정, 그리고 환류(feedback) 전반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여야 간의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주요 개혁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혁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비단 정치 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나 언론, 그리고 국민도 양분되어 격돌하는 바람에 정책적 불임()이 일상화되는 경우가 많다. 정치 세력 간의 합의를 위해서는 연립정부와 같은 합의적 정치 제도, 패키지 딜(package deal)과 같은 다양한 전략적 제휴와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해관계 집단 사이의 합의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개혁 정치의 주역은 주요 이해집단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정 및 중재하고, 그들의 참여와 공감을 제고하기 위해 지속으로 노력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정책 개혁의 형성 및 집행 과정에서 정부와 유관 단체 간의 다자 교섭(multilateral negotiation)과 집단적 합의(collective agreement)가 일상화되어 있다. 노-사-정의 사회적 파트너십이 그 대표적 예다.
거시적 개혁일수록 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정부는 다양한 계층의 국민 여론을 수렴할 필요가 있으며, 소통적 담론을 통해 정책의 필요성과 적절성을 국민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특히 개혁이 장기화될 때, 국민은 ‘개혁 피로’를 느끼게 되며 이는 개혁에 대한 공감대와 지지도가 감쇠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아울러 개혁 동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개혁에 참여하는 주요 집단에 대해 적절한 보상 체계와 유인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교육 개혁의 경우, 교사와 해당 공무원 등이 그 대상이 된다.

 

2. 4. 전체 사회와의 연관 구조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하위 체제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같은 맥락에서 교육 개혁도 교육이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제도적 환경과 부단히 교섭하면서 때로는 독립변수로, 때로는 종속변수로 기능하며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특히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영역이다. 인간은 본래 복잡한 존재여서, 선거 때는 ‘정치인’도 되고, 시장에서는 ‘경제인’이 되는가 하면, 평생학습 사회에서는 생애 주기에 걸쳐 ‘학습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을 대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개혁의 경우, 교육 문제를 다른 하위 체제와 절연하여 미시적 · 폐쇄적 · 한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마땅히 전체 사회와의 연관 구조 속에서 살펴보고, 또 그 관계 속에서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 개혁은 인적 자원, 고용노동 시장, 산업, 사회복지 등 여러 정책과의 연관 구조 속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이는 개혁의 정책적 실효성을 높이는 중요한 열쇠다.

 

3. 사회투자 국가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논의한 교육 개혁이 추구해야 할 큰 방향, 즉 수월성과 형평성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사회 전체의 연관 구조 속에서 합의를 통해 점진적 · 합리적 개혁을 추구하는 현실적 모델은 존재하는가. 여기서는 이에 근접한 모형으로 1990년대 이후 유럽에서 크게 부상한 이른바 ‘사회투자 국가(social investment state)’ 내지 사회투자적 접근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사회투자 국가론의 이론적 뿌리는 멀리 스톡홀름학파의 뮈르달(K. Gunnar Myrdal)이 활동하던 1930년대의 스웨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현대적 맥락에서 볼 때는 1997년 집권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신’ 노동당 정부의 ‘제3의 길’이 그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 관점은 2000년대 이후 유럽 각국으로, 그리고 유럽연합(EU)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EU의 많은 나라에서 이 관점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회투자 국가론은 후기 산업 사회의 도래, 고령화 등 현대의 급변하는 정책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서구의 사회 및 교육 정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시적 정책 접근 모형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경제적 효율성과 기존의 사민주의 복지국가들이 표방하던 사회적 형평성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정책 노선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양재진, 2008; Giddens, 1998, 2001; Morel et. al., 2011).

 

사회투자 국가론은 교육 및 사회 정책을 경제 성장 및 고용 증진에 있어 필수적인 생산요소로 간주하고, 인적 자원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강조한다. 이 관점은 또한 결과의 평등보다는 기회(혹은 생애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지식 기반 사회의 새로운 위험들, 즉 저숙련, 저지식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 즉 ‘지속적 고용능력(sustainable employability)’의 제고에 역점을 둔다. 그런 의미에서 급여와 권리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복지국가 지향과는 차이가 있다. 이 모형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라는 관점에서 ‘생산적’ 내지 ‘사회투자적’ 복지 및 교육에 깊은 관심을 쏟으며, 특히 ‘예방적 투자(preventive investment)’에 정책적 역점을 둔다.
이러한 정책 접근은 특히 교육 정책이 체제의 경쟁력 제고에 기여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교육 체제와 교육 과정의 투자적 효용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적정 수준의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데도 개방적 입장을 취한다. 학부모와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공급자들(학교, 교사) 사이의 경쟁을 촉구하는 것도 그러한 예다. 하지만 사회투자 국가론은 경제적 생산성과 사회 정의 실천의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육에 있어 보편적 투자와 더불어 사회적 · 교육적 취약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에도 적극적이다. 따라서 소외 계층에 대한 교육 기회의 확대와 교육복지 서비스의 제고에도 앞장선다.

 

또 다른 사회투자 국가론의 특색은 생애 주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래 시민’인 아동에 대한 투자다. 이는 예방적 투자의 의미도 동시에 지니는데, 영유아에 대한 공공 보육 및 교육 서비스 강화 및 질적 제고는 유아기 교육 투자의 탁월한 효과성, 출발선에서의 교육 평등 실현, 저출산 완화 및 여성 근로 촉진 등 다양한 맥락에서 그 투자의 효과가 크게 인정된다.(주2) 그 밖에도 고등교육 및 평생교육, 그리고 노동자의 업무 능력을 지속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교육 훈련 등에 각별한 정책적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투자적 접근은 또한 사회 전체의 연관 구조라는 차원에서 여러 유관 정책 영역 간의 유기적 연계를 강조한다. 따라서 교육, 고용 및 노동 시장, 산업 및 사회 정책 등을 필요에 따라 연계해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이를 통해 사회투자적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덴마크를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에서 최근 평생학습 시스템과 이른바 ‘유연안정성(flexicurity)’의 결합을 시도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여기서 유연안정성이란 노동 시장의 유연성과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 그리고 사회보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통합적 연계 정책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동시에 평생학습 시스템이 제 구실을 하고,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교육과 직업훈련, 고용 관련 정보 및 서비스 제공, 취업 알선 등 적극적 · 예방적 고용 창출 노력이 계속되며, 아울러 사회보험 등 다양한 공공 서비스를 통해 적정 수준의 사회보장이 뒷받침된다면 지속가능한 고용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투자 국가 모형은 교육 개혁을 시도하려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준거 틀을 제공한다.

 

4. ‘5·31 교육 개혁’을 되돌아보며(주3)

4. 1. 개요

우리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교육 개혁이라 볼 수 있는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 개혁’을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1995년 5월 31일, 첫 번째 교육 개혁 방안이 발표된 후,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세 차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교육 개혁 방안이 발표되었다. 120개의 정책 과제로 정리된 이 엄청난 규모의 교육 개혁 패키지는 한국 교육의 기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문민정부에서 5·31 교육 개혁이 가장 세차게 진행되던 시기, 즉 1995년 12월에서 1997년 8월까지, 그리고 한참 뒤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부터 2005년 1월까지 두 차례 교육부 수장으로 재직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5·31 교육 개혁의 정책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특히 정책 집행 과정의 책임자로서 120개 교육 개혁 과제 중 약 3분의 2를 시행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다시 1년 조금 넘게 교육 정책을 주도하며, 그간의 추이를 점검하고 이후의 방향을 세우는 일에 일조할 수 있었다.
5·31 교육 개혁은 기존의 권위주의적 발전주의 국가의 ‘권위 관계’에 기초한 위계적이고 획일적이던 공급자 위주의 교육 체제를 자율과 경쟁, 다양화와 특성화에 기초한 수요자 중심의 열린 교육 체제로 바꾸는 역사적 작업이었다. 한마디로 한국 교육은 바로 이 5·31 교육 개혁을 통해 ‘새 판’이 짜였다.

 

5·31 교육 개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많은 이가 문명사적 전환에 대응한 성공적인 교육 개혁이라고 상찬하는가 하면, 또 적지 않은 이가 이를 신자유주의의 정화()로 한국 교육을 그르친 실패작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5·31 교육 개혁의 생명력과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이는 없다.
돌이켜보면, 20세기 말 우리가 경험했던 변화의 격랑은 그 진폭이나 심도에 있어 실로 미증유했다. 세계화, 정보화, 지식사회화라는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이 급격히 진행되었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화의 파고가 무척 높았다. 5·31 교육 개혁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 거시적 시간에 태동했다.
문민정부의 교육 개혁이 그전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교육 개혁과 크게 다른 점은 첫째, 그것이 교육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개혁을 시도한 종합적 개혁 방안이었다는 점과 둘째, 시대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세계화를 비롯한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추진된 개혁이었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최초의 민주 정권이 주도한 이른바 ‘교육 혁명’이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때 제시된 대부분의 개혁 정책 과제가 실제로 집행되어 이후 한국 교육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안병영 · 하연섭, 2015) 등이다.
문민정부 이후에도 역대 정권은 수많은 교육 개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그 이후의 개혁은 대부분 미시적 차원의 부분 개혁, 말하자면 ‘땜질’ 개혁이었고, 역사적 조망이나 확고한 국정 철학에 입각한 ‘큰 틀’에서 이뤄진 본격적 개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4. 2. 정책 과정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5·31 교육 개혁의 정책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5·31 교육 개혁을 창안한 주역은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청와대와 교육부의 관여 및 역할도 논의되어야 마땅하다. 교육개혁위원회(이하 교개위)는 개혁의 주체로서, 태생적으로 이상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이에 반해 교육부는 차디찬 현실에 맞서 개혁안을 집행해야 하므로 비교적 더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한편 청와대는 ‘좋은 개혁안의 창안’과 ‘성공적인 집행’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 교개위의 이상주의와 교육부의 현실주의를 중재 · 조정하고 조율하는 데 힘썼다.
제1기 교개위(1994년 2월~1996년 2월)는 민주화의 여명기에 ‘교육 혁명’을 표방하며 출범했기 때문에 개혁 성향이 무척 강했다. 뿐만 아니라 ‘비관료적, 비교육계, 민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교육 관료제에 대한 불신과 비판적 기조가 뚜렷했다. 따라서 초기 교개위가 교육 개혁 방안을 창안하는 과정에서 교육부가 이에 관여할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교육부와 청와대(수석)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청와대는 어차피 휘하의 교육부 출신의 교육비서관과 행정관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야 하므로 교육부와는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협업할 기회가 많았다. 따라서 양자 간의 갈등 및 긴장의 수위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한편 교개위와 청와대 수석 간의 관계를 보면, 기본적으로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협력 관계였지만, 때때로 긴장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특히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지향하는 개혁 방안 성안()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긴장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긴장과 갈등은 밖으로 크게 표출되지 않은 채 실무 전문가들 간의 집중적인 협의와 토론을 거쳐 적절히 조율되었다. 이처럼 양자가 파열음을 최소화하면서, 조심스레 부딪치는 역동적 과정 속에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고, 개혁 방안의 질적 수준은 오히려 한 단계 상승했다.
그러나 제2기 교개위(1996년 4월~1998년 2월)의 출범 이후 교개위와 청와대, 그리고 교육부의 관계는 사뭇 달라졌다. 삼자 간의 갈등 수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개혁 초기의 질풍노도 시기가 지나면서 한때 서슬이 퍼렇던 교개위의 예기가 얼마간 무뎌졌고, 무엇보다 시간과 더불어 3자 간 상호작용을 거쳐 나름대로 교섭의 패턴을 학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제1기의 치열한 ‘담론’을 통해 총론의 철학적인 문제는 이미 종결되었고, 제2기로 미룬 난제들에 대해서도 얼마간 그 논의 방향이 정리되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 제2기 교개위의 주요 과제는 이미 시행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개혁 사업을 교육 현장에 착근시키는 것이었으므로 3자 간의 갈등 요인 자체가 크게 준 것도 있다. 이에 따라 교개위-청와대-교육부 간의 관계는 ‘긴장 모드’에서 ‘협력 모드’로 바뀌었다.
5·31 교육 개혁의 정책 과정을 보면, 특히 그 창안 과정에서 이명현(제1기 상임위원)과 박세일(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역할과 비중이 매우 컸다. 두 사람 모두 공익적 관점과 시대적 통찰, 그리고 국가 경영에 관한 전략적 사고를 갖춘 ‘경세가형’ 인물이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혁신으로서 5·31 교육 개혁의 완성도가 당시 이룩한 수준에 이르렀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4. 3. 보정() 노력

5·31 교육 개혁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정책의 창안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정책을 집행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것을 재창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책 집행자는 정책 생태계의 현실적 조건과 실현 가능한 다양한 수단을 매개로 정책 설계도를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개혁안 특유의 이상주의를 정책 생태계의 현실에 맞게 조율하고, 입법 과정을 통해 법제적 형식을 갖추고, 구체적 프로그램화 과정을 거쳐 정책을 집행한다. 그 과정은 단순한 관리 · 기술적 차원이 아닌, 그 자체로 무수한 미시적 정책 결정과 이해관계의 조정을 포함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에는 정책 집행자인 장관의 정책 비전과 정책 의지 및 정책 역량, 그리고 그에 대한 고뇌가 녹아 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관인 교개위가 내놓은 5·31 교육 개혁 방안은 대체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민주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정권의 특성과도 깊이 연관된다. 이에 따라 기존의 획일적이고 규제 위주였던 공급자 중심의 교육을 좀 더 자율적이며 수요자 중심인 교육으로 바꾸고, 교육 과정도 민주화하자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들 교육 개혁 과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월성을 지향하는 방안이 주류를 이루었고, 협력과 공존 능력을 제고하고 교육 소외를 극복하며 인간성을 도야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즉 거시적 정책 지형은 형평성에 비해 다분히 수월성 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5·31 교육 개혁의 주요한 시기에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나는 거시적 교육 정책 틀의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형평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 ‘교육복지’라는 블루오션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고심 끝에 교육부의 정책 관료들을 독려하여 합동 연구팀을 구성해 집중적인 연구를 시행했고, 그 결과를 집약해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복지종합대책(1997-2000)’을 수립했다.(주4)

 

오늘날에는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었으나, 당시로서는 교육부 정책 어젠다로 역사상 처음 등장한 생소한 개념이었다. 나는 장관으로서 교육부 회의나 정책 토론 때 의도적으로 ‘교육복지’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이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촉구했다. ‘교육복지종합대책(1997-2000)’에는 교육 소외 집단인 학교 중도 탈락자, 학습 부진아, 특수교육 및 유아교육 대상자, 귀국 자녀 등에 대한 다양한 지원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이후에도 재임 기간 동안 이들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문민정부의 거시적 정책 지형을 보정()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아보려 애썼다. 위 사례 가운데 중도 탈락자 대책은 ‘대안학교 설립 및 운영지원대책(1997. 3)’으로 발전해 훗날 대안학교가 제도권에 들어오는 단초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교육부는 1997년 8월 교육방송(EBS) 위성수능방송을 출범시켰다. 국가가 나서서 과외를 한다는 데 대해 적잖은 비판이 따랐으나, 나는 정부가 무상으로 양질의 수능 방송을 제공하는 것이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도 교육복지 차원의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위 두 사업은 5·31 교육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그것을 보정하기 위해 장관이 창안하여 주도한 사업이었기에 교육부 안에서는 장관 프로젝트라 불리기도 했다.(주5)

 

4. 4. 평가

5·31 교육 개혁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뜨겁다. 대체로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5·31 교육 개혁이 최초의 국가 수준 종합적 청사진이라는 점, 한국의 교육 문제를 역동적으로 의제화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권위주의에 예속되어 중앙집권적 · 폐쇄적 · 획일적으로 운영되던 기존 교육의 틀을 투철한 미래 조망을 바탕으로 혁명적으로 바꾼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또 개혁 과제의 대부분이 실제로 집행되어, 교육의 가시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학교 환경 및 여건의 변화, 교육 정보화에서 초기 성과가 두드러졌고, 학업 성취도에서도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다수의 법령을 개정해 교육의 기본 틀을 미래지향적으로 다시 세운 점도 높게 평가된다.
반면 5·31 교육 개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대체로 문민정부 교육 개혁의 기본 논리와 이념이 ‘신자유주의’로 집약되며, 한마디로 ‘경제의 교육 지배 논리’(주6)라는 비판이다. 문민정부 교육 정책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교육 공급자의 자율과 경쟁을 앞세워 각종 시장주의 정책을 의도적으로 양산하며, 시장 기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대학 준칙주의, 국립대 법인화, 특수목적고 및 자율형 사립 학교 확대, 사학의 자율성 제고 등을 든다. 주지하다시피, 5·31 교육 개혁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 세력은 전교조, 민교협, 교수노조, 범국민교육연대 등인데, 이들은 문민정부의 교육 개혁을 시장주의라는 단일적 이념 잣대로 재단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성과도 ‘시행착오의 연속’, ‘열정과 실망의 악순환’, ‘일부 성공, 대부분 교착 상태’라는 식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5·31 교육 개혁을 성찰적 · 객관적으로 개관하면, 5·31 교육 개혁의 창안 주역들이 세계화라는 시대적 추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자율과 경쟁에 역점을 둠으로써 시장 기제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개혁도 시대를 뛰어넘기는 어렵다. 당시의 미래조망과 시대사조에 입각했을 때, 5·31 교육 개혁이 수월성에 편향된 데는 ‘불가피’한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5·31 교육 개혁에는 세계화 못지않게 민주화의 격류가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정보화 및 지식사회화도 주된 변수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들 사조가 한데 작용한 다수의 개혁 과제를 단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환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5·31 교육 개혁의 핵심 과제였던 ‘학교운영위원회’는 세계화보다는 오히려 민주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대입 개혁의 핵심 과제였던 ‘종합생활기록부’ 또한 공교육 정상화를 겨냥한 것이지, 신자유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런가 하면, 역시 5·31 교육 개혁의 역점 사업이었던 교육 정보화 사업은 세계화의 흐름과 밀접히 관련되나,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 문민정부의 교육 개혁가들 중 극단적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를,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장단점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개혁의 패러다임을 비교적 유연하게 구성하고, 해석하고, 운영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5·31 교육 개혁의 창안자들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한국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데 합의했고, 그런 까닭에 수월성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교육 수요자들의 적성 및 창의성 신장과 인성 교육, 그리고 형평성의 제고에도 적지 않은 정책적 관심을 두었다. 다만 그 개혁 과제들이 우선순위에서 큰 폭으로 밀렸고, 그로 인해 정책적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5·31 교육 개혁은 그것이 지닌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 근본 틀을 견지해왔고, 그 바탕에서 한국 교육도 버텨왔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가 가능할 듯하다.

 

5. 한국 교육의 자화상과 새 교육 개혁의 필요성

큰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 교육은 한국 밖에서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내가 교육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한국을 찾은 다른 나라의 교육부 장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었다. 방한에 앞서 한국에 대해 공부를 했더니, 그간 한국이 성취한 놀라운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원동력이 바로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교육을 상찬하며, 미국 교육이 본받아야 할 점이 많음을 역설했다. 그런가 하면 2015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세계교육포럼’에서도 한국 교육이 긍정적 측면에서 많은 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살펴볼 때, 그간 한국 교육이 거둔 성취가 정부 주도의 교육 정책 성공에서 비롯되었다고 줄여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정부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난지 곳곳에서 전시연합대학을 여는 등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교육입국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부 못지않게 학문과 학습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의 문화, 그리고 교육에 대한 부모의 열정과 헌신도 이러한 성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일컬어지는 ‘5·31 교육 개혁’이 시행된 지도 21년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 교육은 학교 환경 등 교육 여건의 개선과 교육 정보화의 진척, 그리고 학업 성취도의 제고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또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을지언정,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어둡고 우려되는 측면이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여 읽기, 수학, 과학 과목의 국가별 성취도를 비교하는 ‘국제학생평가(PISA)’를 보면 한국 학생은 항상 최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여기에는 매우 어려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 대만, 일본 등 유교 문화권의 다른 아시아 선진국들도 PISA 성적표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문제는 비슷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에서는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이 모두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있는 반면, 유독 한국만 행복 지수가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일본 학교라고 하면 ‘집단 따돌림’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일본 학생들은 80% 이상이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반면 우리 학생들은 60%만이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해 압도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권재원, 2015). 이처럼 입시 위주, 지식 교육, 경쟁 교육에 치중하다 보니 한국 교육에서 ‘학습의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교육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더없이 뼈아픈 비판에 직면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와 교육계에서 인성 및 창의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늘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수준에 비해,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과 실천되는 수준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육에서 인성과 창의에 대한 강조는 단지 수사()에 그칠 때가 많았다.
5·31 교육 개혁 이후 역대 정권은 미시적 차원의 수많은 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 정책의 대표적인 쟁점인 입시, 고교 평준화, 사교육비 경감, 그리고 인적 자원 등 현안에 있어, 이제껏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2007). 또한 5·31 교육 개혁이 추구했던 ‘자율과 경쟁’도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경감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다양화와 특성화’를 통해 대학 서열 구조가 완화될 것을 기대했으나 그 역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문민정부의 교육 개혁 과제 중 성안 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던 교육 자치 제도의 개혁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평생교육과 직업교육의 성과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학벌주의와 승자독식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요인과 집단의식도 작용했고, 교육 자치의 매개가 되어야 할 중간 조직의 부재 등 외적 요인들에 기인한 바도 크다. 그러나 정부가 장기적 관점의 거시적 틀과 일관된 정책 기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단절적 정책 설계와 집행, 그리고 미시적 차원의 개입에 급급했던 점도 위의 제반 정책들이 성공하지 못한 주요 원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제 이들 다양한 교육 정책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하고, 좀 더 큰 틀에서 ‘새 판’을 짤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계층 구조와 연관 지어 살펴볼 때, 교육 개혁의 필요성은 더 절실하다. 해마다 안정적 중산층의 비율은 줄어들고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양극화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계속되는 세계화로 더 심화될 전망이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는 곧바로 계층 간 경제력 차이에 따른 교육비 부담 능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질 테고, 이것은 다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측면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거시적 · 종합적 · 정책적 대응이 시급히 요구된다.
나는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 경우 한국 사회의 엘리트 구조가 소수에 의해 동질화, 특권화될 수 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 지금도 이른바 일류대의 입학생 비율을 보면, 그들 중 다수가 특목고 · 자사고 출신이고, 또 대부분이 서울 강남 등 대도시 부유층 내지 상위 중산층 지역 출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중 많은 학생이 사교육 혜택 및 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보호 하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세대다. 또 이들 중 많은 수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가족 간 네트워크의 도움을 딛고 관계, 재계, 법조계 등 사회 요직에 진출하여 이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해가고 있다. 이들은 출신 배경 및 교육 과정이 대체로 유사하며, 세계관이나 생활 양식도 흡사한 동질적 집단이다.

 

이들이 과연 우리 사회의 그늘진 주변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그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고뇌할까. 또 다양화와 특성화, 융합과 재창조가 대세인 세계적 흐름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동참할 수 있을까. 소수의 폐쇄적 · 동질적 엘리트 구조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약화시키고, 사회 통합을 심대하게 위협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옛말이 되어버린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반 문제와 조건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논의를 거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는 한두 가지 정책이나 제도를 개혁한다고 해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급진적 충격 요법도 적절치 않다. 사회적 계층 상승의 주도적 변수의 하나가 교육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교육 영역에 있어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거시적 틀의 교육 개혁이 시급한 이유다(안병영, 2015b, 88~89쪽).
한때 많은 사람이 ‘세계화’ 하면 무한 경쟁을 떠올리고, 시장 기제의 활성화와 경쟁력 제고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적 해법을 정답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많은 이가 ‘협력’과 ‘나눔’ 그리고 ‘상생’의 가치를 품에 안지 않고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눔 경제’, ‘협력적 공유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리프킨(Jeremy Rifkin)은 정보 사회의 네트워크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유튜브나 무크(mooc)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한계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양질의 콘텐츠를 폭넓게 공유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세계는 이미 ‘공유 사회’로 전환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존 매키(『깨어 있는 자본주의』)나 오스트롬(『공유의 비극을 넘어』)도 한결같이 공동체의 회복을 통한 자본주의의 한계 극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단기적 이윤과 이익 추구를 넘어 장기적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관점에서 기업이나 자원, 환경, 그리고 국가 경제를 바라볼 때, 이제 우리는 경쟁을 넘어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일상 속에서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안병영, 2015c). 최근 들어 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공동체 모형이 제기되고 집단 지성과 집단 창의성이 자주 회자되는 것도 이러한 추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5·31 교육 개혁에서 제시된 정부의 역할은 교육을 둘러싼 제도적 환경을 ‘권위’ 관계에 기초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것에서 ‘자율과 경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근본부터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 영역에서도 시장 기제가 활성화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 면이 있고, 이에 따라 ‘형평성’보다는 ‘수월성’에 더 큰 역점을 두기도 했다. 이후 20년 동안 ‘교육의 시장화’가 우리 교육의 거대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향후 교육 정책의 방향은 시장 기제의 활성화라는 과거의 역할에서 벗어나, 교육 영역에서 시장화가 가져올 부정적 효과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역할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다시 ‘수월성과 형평성’ 그리고 ‘경쟁과 상생’의 조화가 교육이 지향해야 할 큰 방향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사회와 교육계에서 인성 및 창의 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그간 인성 교육과 창의 교육이 입시에 밀려 수사에 머물렀던 점을 올바로 인정하고 통렬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인성 교육과 창의 교육의 본질이 ‘공감 능력’의 제고에 있다고 본다.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일상 속에서 배려, 나눔, 협력, 상생의 마음 밭을 다듬는다. 또 창조와 혁신을 인간의 복지와 행복 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실행한다. 공감 능력은 또한 상상력의 원천이며 창조의 샘이기도 하다. 제4차 산업혁명, 즉 지능정보 사회의 키워드인 ‘융합’도 공감 능력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공감 능력의 배양을 통해 인성과 창의성이 바르게 만나야 한다. 일그러진 인격에 창조적 재주가 보태지면, 그것은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새로 구상할 교육 개혁은 마땅히 그간 소홀히 했던 상생 가치와 공감 능력의 제고에 더 큰 역점을 둘 필요가 있다.

 

1995년 고고의 성을 울렸던 5·31 교육 개혁 이후 지난 21년간 우리 사회는 크게 변했다. 199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2282달러였다. 지금은 그 배를 넘어 3만 달러에 육박한다. 그런가 하면 그간 산업 구조도 서비스업 위주로 재편되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이용자가 20만 명 이하였는데, 이제는 모바일 기기의 발달로 인터넷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고, 사물인터넷, 로봇, 인공지능, 빅데이터가 인구에 회자되는 제4차 산업혁명, 이른바 지능정보화 시대에 진입했다.
그러나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환경적 변화는 인구 감소와 인구 구조의 변화다. 그 직접적인 영향은 학령 인구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교육의 작동 원리(modus operandi)가 완전히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팽창 지향의 교육 체제에서 감축 관리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줄어드는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인적 자원 관리 시스템을 새롭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교육 정책도 학교 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교육과 경제의 연계가 강화됨에 따라 지식경제를 견인할 창의력을 갖춘 고급 인재의 양성, 직업교육의 활성화, 그리고 산학 협력의 강화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듯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한국 교육의 대응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안병영 · 하연섭, 2015, 60~61쪽).
이러한 제반 교육 환경의 변화와 도전,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새로운 교육 수요와 위험을 거시적 틀 안에서, 또 유기적 관계 속에서 면밀히 살피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제반 여건을 감안할 때, 지금이 새로운 교육 개혁의 적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주7)

 

6. 제언: ‘미래한국교육위원휘(가칭)’의 창설

내가 두 번에 걸쳐 3년 가까이 교육부 수장을 역임하며 마주한 가장 커다란 난관은 교육 영역에 과도하게 침투한 이념이었다. 교육이 미래 세대를 키우는 일이고, 또 교육의 향방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므로, 정치사회의 각 분야에서 교육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중요한 교육 쟁점이 이슈가 되면, 여야 정당은 물론 시민사회, 언론, 교육계와 일반 국민까지 양극으로 나뉘어 치열한 이념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그 소용돌이 속에서 국리민복에 기여해야 할 중요 정책안들이 교착되거나 좌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다 보면 꼭 필요한 교육 개혁이 물 건너가거나 실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이 좀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정권의 수명을 넘어 주요 교육 정책에 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도로 교육 문제에 대한 대타협 기구로 ‘미래한국교육위원회’(가칭)의 창설을 제안해왔다. 이는 정치사회 지도자, 교육 전문가, 언론계, 학부모 대표가 두루 참여하는 초당파적 협의체로, 여기에서 미래 한국 교육의 비전과 거시적 정책 방향, 그리고 중요한 정책 쟁점에 대해 장기간 집중적인 토의를 거치고, 이해관계의 조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구상이다. 이 협력적 거버넌스가 정권의 수명을 넘어 존속하며 제 구실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 대표의 임기를 9년으로 하고, 3년 임기의 위원을 두어 이를 임기별로 3분의 1씩(중임 가능) 교체해나가는 게 어떨까 한다.

 

이 협의체를 구성하기 위한 다른 중요한 조건은, 대통령의 결단과 주요 정당 간의 초당적 합의다. 또한 이 협의체가 제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의 ‘정치화’ 및 ‘이념화’를 경계하고, 상생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1995년 5·31 교육 개혁이 ‘상대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최초의 문민정부 대통령이 자신이 획득한 정치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교육 혁명’을 표방하면서, 비교적 초당파적인 교육 개혁 기구를 창설하고, 여기에서 창안된 정책 방안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실제 정책의 집행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5·31 교육 개혁 당시, 교육개혁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은 위에서 제안한 미래한국교육위원회의 창설에 있어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 기구의 출범을 위한 준거 틀이나 교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특히 지난 20년간 심화된 우리 사회의 이념화를 감안할 때, 대통령 개인의 결단과 주도로, 또 그 임기 중 활동을 전제로 이러한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은 미래 사회의 중대한 교육 문제에 대해 적실성 있는 해결책을 마련하기에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또 여기서 주요 쟁점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제도화되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입법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초당적 지원에 대한 주요 정당 간의 합의가 없다면, 그중 많은 개혁 과제가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고, 또다시 이념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미래한국교육위원회의 구성과 주된 활동에 대해 주요 정당 간 정치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협의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정권의 이익이나 이념적 지향을 넘어서는 대통령의 역사적 결단이 필요하고, 아울러 주요 정당의 초당적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또한 언론과 시민사회의 호의적 여론 조성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협의체의 인적 구성과 운영 방식을 논의할 때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원회를 구성할 때는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편향된 인사는 가급적 배제해야 하며, 내적 균형과 조화도 필요하다. 또 공동의 목표에 대한 합의, 이성적 토론과 적정 수준의 상호 이해 및 관용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우리 사회의 악화된 ‘신뢰의 위기’와 낮은 수준의 ‘합의 문화’를 감안할 때, 이런 전제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육 개혁을 지렛대 삼아 21세기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승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결단과 그를 실행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그런 의미에서 정권의 수명을 넘어서는 초당파적 미래한국교육위원회의 구성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제안한다(안병영, 2015a; 안병영 · 하연섭, 2015).

 

참고문헌

엘리너 오스트럼(2010), 『공유의 비극을 넘어』, 랜덤하우스.
안병영(2010), 한국 교육의 수월성과 형평성을 위하여, 『사회과학논집』.
______(2015a), 21세기 새로운 한국, 교육에서 길을 찾자, 『무한경쟁에서 개성존중 시대로』, 동아일보 교육심포지움, 2015. 2. 10.
______(2015b). 여섯 가지 이슈와 공감능력의 함양, 『10년 후 한국 사회』,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아시아.
안병영 · 하연섭(2015), 『5·31 교육 개혁 그리고 20년』, 다산출판사.
양재진 외(2008), 『사회정책의 제3의 길』, 백산서당.
이병남(2014), 『경영은 사람이다』,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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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ddens, Anthony(1998). 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Cambridge: Po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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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ey, John & Raj Sisodia(2013). Conscious Capitalism. Harvard Business Review Press.
Schmidt, Vivien A. & Claudio M. Radaelli(2004). “Policy Change and Discourse in Europe: Conceptual and Methodological Issues.” West European Politics 27(2).
Williamson, John(ed.)(1994). The Political Economy of Policy Reform. Washington. D. 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주1 교육 개혁은 정부가 주도하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는 ‘공직 윤리’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공직자의 공공 의식, 자아 성찰과 책임 의식이 주로 거론된다.
주2 영국에서 지역 단위로 아동 센터를 마련하고 지역도서관, 병원, 학교가 네트워크를 구성해 보건과 보육을 관리하고 독서 습관을 키워주는 ‘슈어 스타트(Sure Start)’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역)교육안전망 사업’ 및 ‘방과후 학교’ 등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주3 이 절은 주로 안병영 · 하연섭,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2015)에서 제2부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의 요점을 재정리한 것이다.
주4 1996년 12월에 발표된 ‘교육복지종합대책(1)’과 이듬해 6월에 나온 ‘교육복지종합대책(2)’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주5 이후 필자는 참여정부에 참여하여 EBS 수능방송 및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일조할 기회가 있었다. 교육부는 2004년 4월 EBS 수능방송을 인터넷으로 전환하여 이러닝(e-learning)을 보편화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해 5월 ‘국민 최저 교육 수준 보장’ 및 ‘교육 불평등 해소’ 등의 취지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복지종합대책’이 발표되었다.
주6 이 관점에 따르면, 5·31 교육 개혁이 강조하는 ‘수요자 중심’ 교육은 한마디로 ‘소비자 주권론’인데, 그 핵심 아이디어는 학교와 교원을 교육 서비스의 공급자로, 그리고 학생, 학부모, 기업을 소비자로 보는 경제적 은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7 거시적 개혁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것은, 큰 폭의 개혁은 정권 초기에 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Williamson, 1994). 바로 이 시점이 새 정부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기대가 한창 치솟고, 정부 지도자나 정부의 정치력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작은 다음 정부 초기에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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