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푸는 기술은 늘지만, 사고력·창의력은 줄어들어
김수연(가명) 양은 초등학생 시절, 장래희망을 '수학자'로 적을 정도로 수학 공부를 가장 좋아했다. 도형의 질량과 부피를 구하는 과정에 큰 흥미를 느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학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 성적도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수연이에게 수학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됐다. 이유도, 흥미를 느낄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문제풀이만을 끝없이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공식과 새 단원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부호, 문자들 때문에 수연이는 급기야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수포'를 선언하고 말았다.
수연이와 같은 '수포자'는 우리나라 총 고등학생 수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을 재밌게 공부하는 방법을 아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수능에서의 수학영역은 '번호 한 개만 내리 찍어도 5등급은 받는다'는 이야기도 돌 정도니, 이미 수학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은 수학 공부를 진지하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최수일 박사(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수학 수업을 중심으로 학교에서 현재 행해지는 수업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혁신하는 것이 수업의 질을 높이고, 더 나아가 교사의 자긍심과 직업의식을 높이는 길이라고 말한다. <에듀진>은 최수일 박사가 지적하는 수학 수업의 문제점과 혁신적인 수업 재구성 방법을 소개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학교 컨설팅 또는 수업 컨설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수업에 대한 전국 각 지역의 인식의 차이를 많이 느낀다.
매달 컨설팅을 하는 대여섯 학교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중학교다. 그리고 간간이 다른 지역을 일회성으로 다닌다. 확실한 것은 교육감이 진보 성향인 지역과 보수 성향인 지역의 수업에 대한 인식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수업 혁신 학교’ 존재 여부로 알 수 있다. 진보 성향 지역에는 수업 혁신 학교가 많이 나타나는 반면, 보수 성향 지역에서는 수업 혁신 학교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수업 혁신 학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면 전통적인 교사 중심의 수업관에서 벗어나, 수업의 주도권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교사는 수업을 기획하고 조력하는 역할로 아이들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학교다.
초등학교 수학과 중등학교 수학의 차이
얼마 전 서울의 모 지역 교육지원청에서 주최한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초·중·고등학교 교원연수'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초등학교 수학과 중등학교 수학의 가장 큰 차이는 문자와 부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문자 기호를 사용하여 식을 세우는 이유는 식이 세워진 이후에는 가감법 등의 간단한 식의 계산법으로 문제의 해가 구해진다는 편리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놓고 보면 분명 문자와 부호의 사용이 쉬운 해법이긴 하지만, 시험이 아닌 평상시 공부를 할 때마저 문자와 부호를 사용하는 연습만 한다면 아이들의 사고력이나 창의력은 갈수록 저하될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 문자와 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수학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수학을 가르치는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면, 중학교 이후의 수학교육에서 문자나 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학습에 소홀한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학교 이후의 수학교육이 자칫 아이들에게 계산력만 키우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수학, 문자·기호 사용이 사고력 떨어뜨린다
피아제가 주장한 바대로 하면 대체로 초등학생의 인지 발달 단계는 구체적 조작기에 해당하며, 중학생 이후부터는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중학교 이후의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를 보면 추상적인 수식이나 함수를 구체적인 조작 활동 없이 마구잡이로 도입하고 있다. 일부 수학 교육학자들은 중학생 이후는 형식적 조작기에 들어가므로 구체적 조작기에 해당하는 체험 활동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유치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25년 이상을 고등학생을 지도하면서 이런 비판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해 왔다. 피아제가 주장한 형식적 조작기라는 것이 중학생 이후는 형식적 조작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피아제가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중학생 이후는 학습의 결과가 형식적 조작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고등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수학의 새로운 개념을 학습할 때 처음부터 형식적 조작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쉽지 않으며, 초등학생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조작 활동을 통해 서서히 이해해 가면서 형식적 조작을 하는 단계까지 학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가 끝나자 모 중학교 교사들이 찾아와서 동감을 표했다.
“이제야 이해가 됐어요. 아이들이 수식을 많이 쓰면서부터 뭔가 달라진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 푸는 기술은 느는 것 같은데, 생각하고 고민하고 사고하는 면에서 항상 부족함이 보였거든요. 그 원인으로 문자 부호 사용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서 했던 문제 해결 전략을 정확하게 공부하고 수업에 적용할 방안을 찾아야겠습니다.”
중고등학교 수학 수업에서 문자와 기호를 지우고, 먼저 구체적 조작 활동을 통해 수학 개념을 학습하도록 하는 것, 전국의 혁신 학교와 교사들이 도전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본 기사는 <나침반 36.5도> 2017년 1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수학 교육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념학습에 대한 제안 (0) | 2019.12.28 |
---|